취코, 취하다 코딩에~
말공부 본문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낮에 읽은 것을 밤에 깊이 고민하고 풀어보는게 공부하는 방법이라고 했다.
공자는 세개 이상을 알지 못하면 더이상 가르키지 않았다.
책을 읽으면서 글의 뜻을 알았다고 해도 깊이 이해하지 못하면 읽자마자 잊어버리게 된다.
또 마음에 깊이 간직할 수 없다. 반드시 배운 것을 거듭 복습하고 깊이 익히는 공부를 해야 비로소 마음속에 간직할 수 있다.
연산군은 11년동안 <소학><대학><중용><논어>후계자 수업을 들었지만 폭군이라는 악명을 쓴 채 폐위되었다.
공자와 세종은 가르치는 것을 귀찮아 하지 않았다.
기하학, 수학은 제왕학의 기본으로 삼았다.
인재를 구했다.
두개의 언어를 안다는 것은 두개의 영혼을 갖는 것과 같다. - 샤를마뉴
장자는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지만 그 가난을 뛰어넘는 여유와 자유를 누렸으며, 유머가 넘치는 삶을 살았다.
고객을 웃게 할 수 있다면 사게 할 수 있다. - 제프리지토머
공자의 가르침을 세가지로 압축한 <논어>의 마지막 문장
不知命無以爲君子也 「천명을 모르면 군자가 될 수 없고,
부지명무이위군자야
不知禮無以立也 예를 모르면 남 앞에 나설 수 없으며,
부지례무이립야
不知言無以知人也 말을 모르면 사람을 알 수가 없다.」
부지언무이지인야
선생께서 겸손해서 그렇지 공자가 어찌 선생보다 더 현명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말을 신중하게 하라. 공자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은 하늘에 사다리를 놓아 올라갈 수 없는 것과 같다. - 자공
"썩은 나무에는 조각할 수 없고 더러운 담장에는 덧칠을 할 수 없다."고 말하여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은 꾸짖을 필요조차 없다."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로 "전에 나는 사람을 대할 때 그의 말을 듣고 행실도 그와 같을 것이라고 믿었지만 이제는 재아로 인하여 사람의 행동을 살핀 다음에야 믿게 됐다."
사랑이란 하기 싫은 일을 하게 되고 이치에 맞지도 않는 것을 하게 된다.
공자는 巧言令色 즉 번드르르 한 말과 꾸미는 얼굴 빛을 한 사람은 仁(두 사람이라는 의미를 지님)이 드물다고 했다.
"말은 많이 할수록 자주 궁해진다" "아는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전체와 부분 부분과 전체는 동시에 존재하며 동시에 봐라봐야 한다.
무위와 무사는 천하, 즉 하늘 아래 모든사람을 지배하려는 황제에게 권고하던 통치방법이었다.
성심이 모든 사태를 판단하고 평가하는데 절대적인 기준, 즉 프로이트가 말한 것처럼 초자아(내면화된 사회규범)가 될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도는 하나로 통한다.
도는 작은 성공에 숨고, 말은 화려함 속으로 숨는다.
장자의 책은 "공자의 추종자들을 비판하고 공격"한 것이다. - 사마천
불가능한 것을 알면서 하는 것과 안하는 것?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은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에 대해서는 박대하고 학대한다. 논쟁하는 말에 인자함이 없으면, 그 말은 침묵하는 것보다 못하고, 그 논쟁은 한 두마디 더듬거리는 것보다 못하다.
중용을 실천하는 사람을 만나 어울리지 않으면 분명히 광자나 견자를 만날 것이다. 광나는 앞으로 나아가 무언가를 하는 사람이고, 견자는 어떤 것은 결코 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다.
노는 것이 바로 미치는 것이다. 미치는 것은 이 세계에 대해 진지하지 않거나 혹은 어찌되든 상관 없다는 태도를 취하는 것과 같다. 그들은 이 세계에 관심을 갖지 않고 시비에 관심을 갖지 않고 치란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들은 심지어 자기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 그들이 가장 진지한 사람이다. 진지해야만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순진무구하게 생활하고 싶어 하지 않았는데, 그런 생활이 더욱더 꿈속을 해매는 것처럼 보였다.
우언(바깥의 것을 빌려 논증, 생명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말한다.), 이런식의 말하기 방식이 가진 장점은 설득력과 감화력을 확대하기 쉽다는 것이다. 그러나 독자를 백치라 가정하고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다고 가정한 것이다.
중언: 어른의 말을 빌려 쓰는 것
치언:계산하지 않고 하는말, 술 마신 다음에 하는 말, 직접 마음속에서 나온다.
장자는 치언에 대해 특별히 강조한다. 치언이 자연의 분계로서 시비를 조화시키는 언어라고 보기 때문이다. 장자는 치언으로서 자기 생각을 날마다 새롭게 하여 자연의 분계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상대방과 소통할 수 있는 마땅한 길이 없다고 말한다.
문자를 통해서 언어에 도달해야하고, 언어를 통해서 눈에 도달해야하고, 눈을 통해서 귀에 도달해야 하고 마지막에는 의문이 시작되는 지점 무가유(한자)에 도달해야 한다.
이것은 생명과 함께 시작된 것이고, 선택의 여지가 없으며, 이 때문에 저항할 수도 없다.
이점을 안다느 것은 어쩔 수 없는 엄청난 무력감을 느끼게 하는데, 특히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더한 것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상관없이 우리는 모두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寸鐵殺人:한마디의 말로 끝내라
"스승을 두고 제가 어찌 먼저 죽을 수 있겠습니까?" - 안연은 스승의 그 마음을 정확하게 읽었다.
상대의 말과 함께 상대의 심중에 담긴의미까지 제대로 읽고서 자신의 마음속의 말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TPO(시간, 장소, 상황)
우리는 흔히 말을 잘한다고 하면, 듣기 좋은 말을 잘하고, 막힘없이 능수능란하게 이야기하는 능력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진심이 담겨 있지 않은 말은 아무리 화려해도 공허한 울림이 되고만다.
꾸며서 하는 말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말은 그 사람의 내면의 표현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폭넓은 공부를 통해 다져놓은 탄탄한 내면에서 촌철살인의 표현이 나오는 것이다.
반전 대화는 신중하게 사용해야 한다. 특히 공식적인 자리에서, 만에하나 대화를 끝까지 들을 수 없을 만큼 성질이 급한 사람이 있거나, 흥분해서 이성적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사람이 있게 되면 큰 불상사가 벌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서로 마음이 통하고 있는 상사와 크게 부담이 없는 대화를 나눌 때 이걸 사용하며 확실하게 마음을 잡을 수 있다.
공자는 자로를 가르키기 위해 설득할 때 좋아하는 것을 물어 보았다.
오수 선생의 무기는 단 세치의 혀 밖에 없었지만, 그 힘은 100만 대군보다 더 강력한 것이었다.
"부에도 한계가 있는 것이요?"
"물의 한계는 우물의 물이 다 말라 없어진 경우를 말하고, 부는 스스로 만족했을 때가 한계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스스로 만족하지 못해 패망하고 맙니다. 따라서 부의 한계가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 있는 사람만이 심플해질 수 있다.
言中有骨:평범한 말 속에 깊은 뜻을 담는다.
仁한 사람은 말을 신중하게 한다라고 했다. 신중하게 상대를 살펴 상처를 받지 않도록 말을 하되, 분명한 가르침을 담아 자연스럽게 깨달을 수 있게 해야한다. - 자로를 깨닫게 한 것 처럼
"개의 나라에 온 사신은 개구멍으로 들어가지만 나는 초나라에 사신으로 온 만큼 이문으로 들어갈 수 없다"
"우리 제나라는 사신이 임무를 맡길 때 그 나라의 왕에 맞추어 합니다. 상대 국가의 왕이 어질면 어진 사람을 뽑아서 보내고 만약 불초하면 불초한 사람을 보내지요.
"이래서 말 잘하는 자를 미워하는 것이다"
知彼知己:나를 알고 상대를 알면 백번의 대화도 위태롭지 않다.
"염유는 소극적인 성격이라 적극적으로 나서도록 한 것이고 자로는 지나치게 적극적이어서 물러서도록 한 것이다." - 배움이란 모든 상황에서 다 같이 통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성품과 상황과 지식의 정도에 따라서 융통성 있게 주어져야 한다.
장자는 어떤 것에도 집착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사오간없이 집착은 생명에 대해 아무 좋은 점도 없다.
제가 처음 소를 잡기 시작할 때는 보이는 것마다 소 아닌 것 없었습니다. 3년이 지난뒤 저는 소의 전체 모습을 본적이 없습니다. 지금 저는 신으로 소를 대하고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감관과 지각이 멈추고 신의 작용이 시작됩니다. 자연의 결에 따라 큰틈을 치고 큰 구멍을 따라 칼을 당겨 본디부터 나 있는 길을 따릅니다. 지맥과 경맥이 뼈에 붙어있고, 살과 근골이 서로 모여 있는 곳에서도 조금의 어려움도 느낀 적이 없었으니 큰 뼈에 대해서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훌륭한 요리사는 한 해에 한번 칼을 바꾸는데 자른다(소와 사투를 벌인다. 보통의 요리사는 한달에 한 번 바꾼다.) 지금 저의 칼은 19년이 되었고 잡은 소만도 수천 마리나 되는데 칼날은 마치 방금 숫돌에 갈아 온 것 같습니다."
우리가 만약 소를 잡는 실제적인 과정을 '손으로 잡기'라고 부른다면 손으로 잡기 이전에 표정은 이미 '눈으로 잡았고' 눈으로 잡기 이전에는 '마음으로 잡았으며' '신으로 잡았다'
육체상으로 우리가 이 세속적 세계의 준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매우 분명하다. 그것은 마치 장자가 홀을 들고, 무릎을 꿇고, 몸을 굽히는 것은 신하의 예이다.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하는데, 너는 대담하게 글지 않을 수 있겠느냐 라고 말한 것과 같다. 마음속으로는 귀함도 천함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지라도 우리는 신분이 높은 사람 앞에서 머리를 숙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생명을 잃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최소한 <천하>에서 말한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세속의 사람들과 어울리는 생활을 해 나가야만 한다.
성인은 좋은것과 싫은 것을 마음에 간직하고 안으로 자기 몸을 상하게 하지 않고 항상 자연에 따르면서 생명을 연장하려 하지 않는것을 말한다.
사물이 모두 똑같지 않은 것, 이것이 사물의 참모습이다.라고 말했다. 똑같지 않은 사물을 우리는 어떻게 똑같이 할 것인가?
제물의 관건은 사실 사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다.
고통을 느끼기에 사람이라는걸 알 수 있다.
크게 지혜로운 이는 대강대강 해야 한다. 왜냐하면 아는 자는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큰 말은 담담해야 한다. 왜냐하면 도에 대한 말은 담담해서 아무 맛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 지혜로운이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따지면서 밤까지 일을 한다. 크게 지혜로운 이가 대강 대강 한 것과 담담한 것은 그것이 나에 대한 앎이 없고, 내가 없고, 나와 세계의 구분도 없고, 내 마음에도 해야 할일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조금 지혜로운 이가 반드시 긴장하는 것은 그것이 나에 대한 앎을 가지고 있고, 내가 있다는 것은 바로 구별이 있다는 것이고, 시비와 미후가 있고, 다툼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침 없는 다툼, 따지기, 충돌, 초조함 속에서 진정한 생명은 매몰되어 버린다. 물론 마음이 있고, 또 그 마음이 격렬하게 활동하고 있겠지만, 그 마음은 성심인 것이다. 성심의 활약은 진심의 사망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모두 '나 자신'은 옳고 '남'은 틀렸다고 생각한다. '나 자신'은 옳고, '남'은 그른 것이다. 모두 자기의 옳고 그름으로 다른 사람의 옳고 그름을 비평한다. 이 때문에 모두들 남이 그르다고 하는 것을 옳다고 생각하고, 남이 옳다고 하는 것을 그르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당연히 독자의 의문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세상에 정말 옳고 그름이 있는가?
도는 만물에 '통'하는 것이지, 도가 만물과 '같은' 것은 아니다.
"타고난 밝음을 따르는 것보다 좋은 것은 없다"라 언급되는데, 타고난 밝음은 바로 사람들을 논쟁의 연못에서 구출해 내려는 것이고, 그 가장주요한 방법이 바로 저것과 이것이 서로 상대방의 잘못을 밝혀 주는 것이다. 저것은 저것의 옳음이 있고 또 저것의 그름이 있다.
선과 악에 관한 지식, 시비에 관한 지식, 외적 대상에 대한 지식등 이른 바 지식이라는 것이 있지만 장자가 볼 때 이런 것들은 참된 지식이 아니다. 참된 지식은 진인과 관련이 있다. "사람의 할 일을 아는 사람은 자기의 지력으로 알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자기의 지력으로 알 수 없는 부분을 수양하여, 타고난 자연적 수명을 다하고 중도에 요절하지 않는데, 이것이 지식의 지극함이다."
"죽는 것과 태어나는 것은 운명이다. 그것이 밤고 낮이 바뀌는 것처럼 일상적인 것은 자연이다. 사람이 간섭할 수 없는 것은 모두 사물의 이치이다"
치언(무심하게 지껄이는 말)을 변화무쌍한 표현 수단으로 삼았고, 중언을 입증의 증거로 삼았으며 우언을 널리 알리는 수단으로 삼았다.
이 세상은 정말로 구제할 수 있는가? 혹은 이 세상은 정말로 한 사람의 개입으로 인해 바뀔 수 있는가?
공자는 물론 적극적으로 이 세상에 개입 하려고 한 사람이었다. 그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요순지도를 실행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결과는 어땟는가? 그는 "노나라에서는 두번이나 쫓겨났고, 송나라에서는 나무가 잘려 죽을 뻔 했고, 위나라에서는 족적마저 지우면서 도망가야 하는 수모를 당했고, 商과 周의 옛터에서 궁지에 몰렸고,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는 포위당해 이레 동안이나 불에 익힌 음식을 먹지 못하면서 상갓집 개처럼 항상 불안에 떨어야 했다.
너는 덕이 어떻게 파괴되고 지식이 왜 생겨나는지 알고 있느냐? 덕은 명성을 드러내려는데서 파괴되고, 지식은 다툼가운데서 생겨난다. 명성이라는 것은 서로 충돌하는 것이고, 지식은 다툼의 도구이다. 이 두가지가 흉기로서 자신의 행위를 훌륭하게 해 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너는 덕이 높고 신념이 강하지만 다른 사람의 기분을 꿰뚫는데까지 이르지는 못했고, 명성을 다투지 않는다 해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데까지 이르지 못했다. 그런데도 인의나 법도와 관련된 말들을 포악한 사람 앞에서 기를 쓰고 말할테니 그것은 다른 사람의 추함을 드러내 자기를 아름답게 보이려는 것과 같다. 이런 것을 남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라고 부른다. 남에게 해를 끼치면 반대로 남도 반드시 그에게 해를 끼쳐 보복할 것이다.
너는 아마 다른 사람에게서 해를 입을 것이다.
천신을 감동시키지 못한다면 산을 옮기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장자는 알고 있었다. 천신은 감정이 없다. 따라서 감동을 받을 수도 없다. 그래서 장자는 포기하는 것을 선택했다.
네말을 들어주거든 말을 하고 네 말이 먹히지 않거든 너는 말을 그쳐라. 병폐가 무엇인지 진단도 하지 말고, 어떻게 고쳐야 할지 처방도 하지 말 것이며, 마음을 한결같이 하고 부득이 할 때만 말하며 괜찮을 것이다.
마음을 바르게 하면 고요해지고, 고요해지면 밝아지며, 밝아지면 텅 비이게 되고, 텅 비어 무위에 들어가면 자연의 도와 일치되어 하지 못하는 일이 없게 된다.
진인은 이 세계의 주인이어야지 노예여서는 안된다. 그러나 혜시는 만물과 온 세계를 해석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자기 자신을 잃었다.
우리는 지식에 대하여 한계를 그어야 하고, 지식과 생명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지식은 생명을 위한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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